영국 케임브리지의 묘지에서 발굴된 중세 부유층 남성의 엄지발가락뼈. 뾰족 구두를 신다가 엄지발가락이 둘째발가락 쪽으로 기울어진 무지외반증 현상을 보였다./케임브리지대
굽이 높은 하이힐을 오래 신으면 발가락이 틀어지기도 한다. 유행을 따라가다가 몸까지 상하는 것은 중세에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상류층이 묻힌 묘지에서 14세기 유행하던 남성용 뾰족 구두 때문에 안쪽으로 휘어진 엄지발가락뼈<사진>가 발굴됐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고고학과의 존 롭 교수 연구진은 지난 11일 국제 학술지 ‘국제 고병리학저널’에 “케임브리지 일대 묘지의 중세 유골을 분석한 결과 부유층일수록 무지외반증(拇趾外反症)이 더 많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무지외반증은 관절이 안쪽으로 구부러져 엄지발가락이 둘째발가락 쪽으로 기울어진 현상을 말한다. 선천적 요인도 있지만 하이힐처럼 발을 꽉 죄는 구두를 오래 신으면서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연구진은 케임브리지에서 성직자와 부유층 신도들이 묻힌 묘지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공동묘지, 중간 계층의 묘지, 그리고 농촌 교구의 묘지 등 네 곳에서 유골 177구를 발굴해 분석했다. 11~13세기 유골에서는 6%만 무지외반증이 확인됐는데 14~15세기 유골은 27%가 엄지발가락이 휘어 있었다.

무지외반증 유골은 65%가 남성이었다. 특히 부유층 묘지에 묻힌 성직자는 절반에 가까운 43%가 무지외반증을 보였다. 노동자 계급은 그 비율이 10%에 그쳤으며, 농촌 묘지에서는 단 3%만 무지외반증이 확인됐다. 원인은 앞부분이 긴 풀렌이라는 남성용 구두였다.

중세 후기 유럽 상류층을 그린 그림을 보면 남성들이 하나같이 앞이 길고 뾰족한 풀렌을 신고 있다./위키미디어
발가락 부분이 둥글던 남성용 구두가 14세기부터 앞부분이 길고 좁은 형태로 바뀌었다. 런던과 케임브리지에서 발굴된 14세기 후반 남성용 구두는 대부분 풀렌이었다.

고위 성직자를 비롯해 상류층에서는 발이 불편해도 풀렌을 고수하는 것이 유행이 됐다. 14세기 영국 작가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이런 풍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풀렌 유행은 잉글랜드 왕인 에드워드 4세가 1465년 런던에서 발가락 부분이 2인치 이상인 신발을 금지시키면서 사그라졌다.

연구진은 앞이 뾰족한 구두는 발가락 변형뿐 아니라 더 큰 부상까지 불렀다고 밝혔다. 무지외반증이 확인된 유골의 52%에서 팔에 최소 한 곳 이상의 골절 흔적이 나타난 것이다. 발가락이 휘면 나이가 들수록 자세의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진다. 연구진은 45세 이상 유골에서 무지외반증과 팔의 골절이 두드러졌다고 밝혔다.

논문 제1저자인 스코틀랜드 애버딘대의 예나 디트마르 박사는 “꽉 죄는 구두를 신다가 발가락이 휘는 것은 오늘날에나 있는 문제라 생각했지만 이번 연구는 중세 성인들도 같은 문제를 겪었음을 보여줬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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